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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북정

    제주시 조천면(朝天面) 조천리 바닷가에 연북정(戀北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가경(嘉慶) 25년(순조 20년:1820)에 지은 것으로서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연북정’이라 이름하였다.
    이 정자 자리는 본래 바다여서 ‘조천석(朝天石)’이라는 바위가 하나 있었을 뿐이었다. 이 바위 위를 돌과 흙으로 메워 정자를 지은 것이다.
    정자를 지은 후 얼마 안 되어 육지에서 어떤 지관(地官)이 왔다. 조천에 이르러 만세동산(조천리에 있는 언덕으로 3·1운동 때 맨 처음 만세를 불렀던 곳)에 올라 바닷가의 연북정 쪽을 보더니,
    “저쪽에 바위가 하나 있을 터인데 이상하다.” 라고 했다.
    “예, 조천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그것을 메우고 연북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칠성(七星)의 마지막별이 저기 가서 떨어진 것이요.”
    내용인즉, 조천면 함덕리 쪽으로부터 언덕 위의 큰 바위가 띄엄띄엄 주천 쪽으로 벌여져 있는데, 만세동산이 여섯 번째요, 마지막 일곱 번째가 연북정 자리의 조천석이라는 것이다. 이 바윗돌이 바로 일곱 개의 별들로서, 그 마지막 별자리에 정기가 온통 모여져 있으니, 연북정 같은 큰 정자를 지을 자리가 된 것이라는 말이다.
    (1975.2.24 조천면 조천리 김돈환(님) 제공)

    조천리의 옛 이름은 조천관(朝天館)이었다. 조천관은 부산·인천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관(三館) 중의 하나로서 제주목(濟州牧)의 출입 항구였다.
    이 선창 가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조천석(朝天石)이다. 조천관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 바위에다 닻줄을 걸어 배들을 매곤 하였다.
    어느 해엔가, 중국에서 유명한 지관이 와서 이 바위를 보고,
    “저 바위를 보이지 않게 감추시오. 만일 감추지 않으면 조천에는 불량한 사람이 많이 나서 이민(里民)이 못 살게 될 것이요, 감추면 인물이 끊이지 않겠소.”
    라고 했다.
    그래서 당시 조천면 관내 9개리의 백성을 부역시켜 성을 쌓는 동시에 이 조천석을 흙으로 덮어 메워 둥글게 높이 쌓아 올렸다. 여기에 정자를 지어 ‘쌍벽정(雙碧亭)’이라 했다가 연군(戀君)의 의미를 붙여 연북정이라 고쳤다.
    그 후로 조천에는 삼대문학이 나고, 현감(懸監)·군수(郡守)가 다수 배출되고, 명월만호(明月萬戶)만도 열여덟 명이나 나왔다.
    (1975.2.24 조천면 조천리 김병화(남·77세) 제공)

    신촌김댁(金宅)효부

    제주시 조천면 신촌리 김씨댁에 며느리가 홀로 살고 있었다. 지금 그 현손(玄孫)이 살아 있다.
    며느리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여든 살이 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었다. 시어머니는 눈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분이었다.
    김씨네 집은 비록 초가집이었지만, 마을에서는 꽤 크고 정결한 편이어서, 외부의 손님이 마을에 오면 으레 이 집에 안내되었다.
    어느 날 암행어사가 이 마을에 왔다. 아무도 암행어사인 줄을 몰랐다. 육지 손님이 지나다 들렀는가 하고 마을 유지들은 이 김씨 집으로 안내했다. 어사는 혼자 사랑방에 머물렀다.
    어사는 사랑방에서 누웠다 앉았다 하며 집안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밤이 깊어 가자 시어머니는 잠자리에 들고 며느리는 부엌에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참기름을 짜고 있는 것이었다. 한잠을 자고 깨어 보니 그때까지 며느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얼마 뒤 며느리는 기름을 다 짜서 자그마한 항아리에다 담고, 시어머니방 난간에 갖다 놓고는 잠을 잤다. 바람이 잘 드는 데 놓아 빨리 식히려는 것이었다.
    동이 트기 시작하자, 시어머니가 일어나 바깥에 나왔다. 시어머니는 곧 이 기름 항아리를 발견했다.
    “사랑에 손님도 들고 하디, 요강을 보기 굳게 놔 두민(두면) 어떵허여(어떻게 해)?”
    시어머니는 중얼거리며 기름 항아리를 들어다 오줌통에 부어 버렸다. 눈이 잘 안 보이는 시어머니는 기름 항아리를 요강인 줄 안 것이다.
    어사는 ‘아차!’하면서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집에 날이 밝으면 기필코 싸움이 일어나려니’했다.
    조금 있더니 며느리가 일어났다. 시어머니 방 앞을 보더니,
    “아이고, 어머님. 이디(여기) 지름(기름) 빠 논 거 놔둔디(놓아 두었는데) 어디 둡데까?”
    “아! 그거 무슨 말고! 오줌 단지(요강) 잇고테(있길래) 저디 앗단(가져다가) 비와 부렀저(비워 버렸다).”
    “예. 내 그만 늦게 일어난 잘못하여졌수다. 일찍 일어낭(일어나서) 잘 놔시민 기영(그리) 아니할걸.”
    며느리가 야단을 지르며 싸움을 할 줄 알았는데, 싸움은 커녕 도리어 미안해하고 사과하며 시어머니를 받드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어사는 올라가, 이 며느리를 효부로 봉했다. 그제야 마을 사람들도 그때 손님이 암행어사인 줄을 알았다 한다.
    (1975.2.29 조천면 신촌리 홍순규(남) 제공)